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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헌과 역사학자들이 인정한 비화가야]-1-
창녕은 고대 화려한 비화가야 시대였다
기사입력 2011-11-18 11:18   최종편집 경남우리신문
작성자 경남우리신문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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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고문서 기록·국내 유명 사학자 인정

관룡사 약사전 신라 불교 공인 179년전 건립

고대 창녕지역은 비화가야 혹은 불사국이란 주권 국가가 존재했음은 각종 고문서를 비롯해 국내 유명 사학자들에 의해 증명되었고 각종 논문에도 발표되어 기정사실로 인정되어 왔다. 그런데 지난 2003년 발간된 ‘창녕군지’에서 고대 국가인 비화가야 시대가 삭제되고, 일개 부족사회체제에서 곧바로 신라 지배하에 있었다는 사실만 명시되자, 지역 향토연구가들이 크게 반발해 지금까지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20년전 발간된 창녕군지에 명백히 명시된 ‘비화가야’시대 부분을 삭제하고 일개 부족사회로 폄하시킨 이는 창녕문화원 산하 ‘향토사연구소장인 김영철씨(금녕 김씨)의 주도하에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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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화가야시대 왕들의 무덤인 송현동 고분군. 당초엔 80여기가 있었으나, 지금은 17기만 남아있다. 일제시대 때 80호와 81호 고분이 일본인 ‘오쿠라’에 의해 도굴되어 엄청난 양의 유물이 일본으로 반출된 바 있어 나라를 빼앗긴 민족의 설움을 간직하고 있다.   © 경남우리신문편집국. 창녕신문


 

 

 

 

 

 

 

 

 

 

 

 

 
김 소장이 지난 1984년 참여해 발간한 창녕군지의 선사시대와 가야시대 편에서 “창녕의 지석묘와 고분군은 주권국가가 존재했었음을 입증하는 유물”이라며 “특히 중국의 삼국지에 소개된 변한 24국에도 ‘기저국’다음으로 ‘불사국’을 기술했을 정도로 위용을 떨친 국가 였음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자랑스럽게 표현했다. 

 그런데 20년이 지난 2003년 그의 주도하에 발간된 창녕군지에는 ‘불사국’편은 아예 삭제하고 “일개 부족으로 독특한 문화권을 형성해 주위 여러 부족사회와 병립하여 중국과 일본등 외국의 역사서적에 기록될 만큼 잘 알려진 지역으로 일찍이 신라와 병합(555년)해 비자화군 또는 비자벌이라고 불렸다”고 말을 바꿨다. 그러면서도 “창녕을 비화가야라고 불러서 가야연맹의 일원으로 이해할 수 있는 가의 문제는 단순히 향토사적인 무제가 아닌 학술적인 과제라 할 것”(창녕군지 157 쪽)이라며 논란의 여지를 남겼다.

20년만에 입장을 바꾼 김 소장은 2008년 3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1984년 발간당시엔 한자 오기등을 교정해주는 역할만 했으며, 2003년 발간시엔 문헌에 나타나 있지 않은 비화가야를 인정할 수 없어 삭제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말대로 창녕이 비화가야 였음이 문헌에 나와 있지 않을 까. 세계 사학자들이 가장 많이 인용하고 있는 중국의 삼국지와 일본의 서기에 명백하게 기록되어 있다. 중국의 삼국지 위서 동인전 한조편에 ‘진한 12국’을 나열하면서 기저국(已柢國) 다음으로 불사국(不斯國)소개하고 있다. 일본 서기의 6국 6가야에도 비화가야가 나와 있다. 또한, 고려시대 일연스님이 저술한 삼국유사의 오가야조에도 ‘비화(非火)가야’가 나온다.

김 소장이 창녕의 고대사를 비화가야로 인정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중 하나로 여기는 것으로 삼국유사 오가야조에 기록된 ‘非火비화(今昌寧금창녕, 䂬高靈之訛공고령지와)’의 주해에 ‘지금의 창녕이다. 아마 고령의 잘못인 듯하다’고 잘못 해석 한 것을 토대로 창녕이 비화가야라고 단정 지을수 없다는 입장을 표방한 듯하다. 이에 향토사학자 오석문씨는 그의 저서 ‘비밀왕국 비화가야’(21쪽)에서 “고령을 두려워하여 잘못 기록했다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삼국유사를 편찬한 일연스님이 신라시대때 지은 삼국사기에 나와 있는 대가야(지금의 고령)를 삭제하고, 대신 ‘비화가야를 넣으면서 주해(지금의 가야. 아마 고령의 잘못인듯 하다)를 붙인 것은 신라의 사서를 정리하면서 고령 토호세력들의 반발을 의식하고 고려 조정에 출사해있던 문무관들의 압력을 염두에 두었던 탓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 오석문씨의 주장이다. 

학자들이 말하는 비화가야

국내 유명 대학의 사학과 교수들의 논문과 견해를 살펴보자. 경북대 주보돈 교수는 “중국과 일본의 역사서에 창녕은 비화가야(불사국)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신라에 복속된 4C말 이전 시기의 창녕지역은 비화가야라는 독립국가가 존재했었을 증명해준다”고 발표했다. 또한, 불사(不斯)와 비사(非斯)의 표기가 다르다는 지적에 대해 주 교수는 “불사나 비사는 지금도 음운과 훈음을 빌려 표기한다”며 “한문식 표기인 ‘불사’를 ‘비사’로 읽을 수 있다”고 일각의 논란을 잠재우고 “비화가야라는 명칭은 삼국유사의 5가야에도 나온다”며 비화가야가 창녕지역임을 입증해주는 대목이라고 견해를 피력했다. 

 계명대 인문학부 사학과 노중국 교수도 지난 9월 10일 영원문화센터 4기 개강식에서 ‘비화가야와 창녕’이란 주제의 특강에서 “창녕이 가야의 일원이었음은 삼국사기 오가야조에도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며 “중국의 동이전 진한전에도 창녕지역에 불사국이란 국가가 존재했음을 기록으로 증명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조 교수는 또 “3C말에서 4C초의 한반도는 격변의 시기로 마한은 백제국에, 진한은 경주의 사로국에 통합되어 갔으나, 변한은 김해의 구야국(가라국)이 중심이 되어 가야시대로 전환되었다”며 “창녕의 불사국은 사로국에의 통합에 저항해 가야 7국의 하나로서 두각을 나타냈다”고 말했다. 노 교수는 “당시 불사국의 위세는 송현동 고분군과 계성 고분군이 증명해주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들 외 국내 유명 사학교수들도 ‘창녕=비화가야’ 였음에 대해 이견을 보이지 않고 이구동성으로 인정하고 있다.

관룡사는 가야시대 창건(?)

창녕지역이 일개 부족사회체제가 아닌 엄연한 국가였음은 고문헌 기록외에도 각종 문화재를 통해서도 추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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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가 불교를 공인하기 전보다 179년 앞서 창건된 것으로 밝혀진 관룡사의 약사전.   © 경남우리신문편집국 창녕신문


 

 

 

 

 

 

 

 

 

 

 

 

 
창녕읍 옥천리 292번지 구룡산 중턱에 관룡사(觀龍寺)란 절이 있다. 영조9년(1733년)12월초 쓴 ‘영남창녕현화왕산관룡사적(嶺南昌寧縣火王山觀龍社蹟)’에 이절의 약사전 보수 공사시 ‘대들보 머리의 겹친 나무가 서로 엇갈려 있는 곳에 영화오년기유(永和五年己酉)의 제자(題字. 서적의 머리나 족자, 비석 따위에 쓴 글자)가 있었으니, 고색을 띠고 있으면서도 먹의 자취가 뚜렷이 나타났고 목면도 마멸되지 않았다’고 적혀 있다.

여기에 기록된 ‘영화오년기유’의 시기는 AD349년으로 계림국 흘해왕 40년, 고구려 고국원황 19년, 백제근초고왕 4년, 가락이시품왕 4년이며 동진(東晋) 목제(穆帝)의 연호이다. 이 사적기 후기에는 “약사전이 처음 진나라 목제의 ‘영화기유’에 비롯되었다고 하는 것은 오직 대들보 사이의 먹 글씨이니 이는 후세의 증거이며 천 여년을 지난 지금....”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 볼때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되었던 소수림왕 2년(AD 372년)보다 35년이 앞서고, 신라가 불교를 공인했던 법흥왕 15년(AD528년)보다 179년 앞서는 시기로 이 사적기로 보면 한반도의 불교 시작은 가야시대임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역사적 기록이다. 

특히, 약사전은 대웅전 본전 배치 이후에 건립되는 점을 감안할 때 관룡사 본전은 이 시기보도 최소 몇 십년 앞서 지어진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관룡사의 사기(寺記)에 따르면 349년에 창건된 것으로 나와 있고, 약사전 보수시 나온 永和五年己酉 제자에 비춰볼때, 불교가 중국이 아닌 인도에서 바다를 통해 가야로 최초 전래되었다는 ‘남방전래설’을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예증으로 볼수 있다. 따라서 고대 창녕지역이 부족사회체제가 아닌 왕권이 강화된 국가였음이 확실하다고 볼수 있다.<김 욱 기자>

이 기사는 경남도의 ‘2011년 지역신문 발전지원사업 자유공모사업’에 선정되어 지원을 받아 작성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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