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에 가볼만한 곳’ 소설 〈토지〉의 무대 평사리
기사입력 2018-10-02 11:47 최종편집 경남우리신문
작성자 노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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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소성에서 내려다본 평사리 황금들판과 섬진강. 평사리는 그 장대한 풍경 덕분에 소설 〈토지〉의 배경이 됐다.
가을은 하늘에서 내려온다.
높고 푸른 하늘은 시나브로 땅으로 내려오면서 여름과 몸을 섞는다.
평사리 황금들판은 가을 정취를 온몸으로 느끼는 여행지다. 고소성에 오르면 평사리 들판이 한눈에 들어온다.
지리산 자락 형제봉과 구재봉이 들판을 품고, 섬진강이 재잘재잘 흘러가는 모습이 감동적이다.
고소성에서 내려와 평사리 들판을 뚜벅뚜벅 걷다 보면 부부송을 만난다.
들판 한가운데 자리한 소나무 두 그루는 악양면의 상징이자 수호신이다.
가을바람이 황금 들판을 밟고 걸어가는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평사리 들판은 박경리 선생의 대하소설 〈토지〉의 배경이 되면서 널리 알려졌다.
평사리 들판을 한눈에 내려다보고 싶으면 하동 고소성에 올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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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소성 입구는 한산사다.
드라마 ‘토지’ 촬영장인 최참판댁 입구에서 왼쪽으로 구불구불 이어진 산길을 자동차로 5분쯤 가면 나온다.
한산사는 구례 화엄사와 창건 시기가 비슷하다고 알려진 고찰이다.
한산사 앞쪽 전망대에 서면 평사리 들판과 섬진강이 나타난다. 고소성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더 높고 깊다.
한산사에서 고소성까지 800m. 제법 가파른 산길을 20분쯤 오르면 드디어 성벽이 보인다.
성벽을 타고 오르면 시원한 바람에 저절로 탄성이 나온다.
바둑판처럼 정돈된 평사리들판 274만㎡가 한눈에 펼쳐진다.
왼쪽 형제봉에서 맞은편 구재봉까지 지리산 능선이 들판을 병풍처럼 감싸고, 오른쪽으로 섬진강이 도도하게 흐른다.
평사리가 소설 〈토지〉의 배경으로 낙점된 결정적 이유를 알 수 있는 풍경이다.
박경리 선생은 경상도 땅에서 만석꾼 두엇은 낼만한 들판을 찾고 있었다. 통영 출신이라 경상도 사투리를 써야 했기 때문이다.
전라도 땅에나 그런 들판이 있나 싶어 낙담하다가, 우연히 평사리들판을 보고 ‘옳다구나!’ 무릎을 쳤다고 한다.
배경이 정해지자 소설은 착착 진행됐고, 평사리 뒷산인 지리산의 역사적 무게와 수려한 섬진강이 소설을 더 아름답게 수놓았다.
그렇게 탄생한 〈토지〉는 현대문학 100년 역사상 가장 훌륭한 소설로 꼽힌다.
악양면 평사리의 대지주 최씨 가문의 4대에 걸친 비극적 사건을 다루며 개인사와 가족사뿐 아니라 역사, 풍속, 사회상을 고스란히 담았다.
고소성은 성벽 길이 약 1.5㎞에 높이 4∼5m 규모로, 방어에 유리한 천혜의 자리를 꿰찼다.
동북쪽은 험준한 지리산이 버티고 섰고, 서남쪽은 섬진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남해에서 올라오는 배를 감시하고, 상류에서 내려오는 적을 막기 좋은 자리다. 〈하동군읍지〉에 따르면 신라 시대에 백제의 침입을 막기 위해 축조한 것이라고 한다.
성벽 위에 있는 잘생긴 소나무 그늘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풍광을 감상하다가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이제 저 들판을 직접 걸어볼 차례다. 한산사로 내려와 동정호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평사리들판 입구에 자리한 동정호. 악양루가 날아갈 듯 섰고, 연못과 산이 어우러진다.
동정호는 평사리들판 입구에 자리한 연못으로, 두보가 예찬한 중국 둥팅호에서 이름을 따왔다.
악양루에 오르니 너른 연못이 한눈에 들어온다.
버드나무가 바람에 치렁치렁한 가지를 날리는 모습이 평화롭다. 악양루에서 내려와 평사리들판을 가로지른다.
황금빛 들판 사이에 난 신작로를 500m쯤 걸으면 소나무 두 그루가 다정하다.
부부송 앞에 ‘평사리들판’ 안내판이 있다. 평사리들판은 악양벌, 무딤이들이라고도 한다.
악양면 토박이들은 홍수가 나서 섬진강 수면이 높아지면 이 들판에 무시로 물이 들어오고, 수면이 낮아지면 다시 빠져서 무딤이들이라고 불렀단다.
토속적 어감이 친근해 ‘무딤이들 무딤이들∼’ 하니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간다.
박경리 선생이 마른논에 물이 들어오는 소리를 좋아했다고 한다. 가을철 벼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과 소리도 마음을 넉넉하게 해준다.
평사리들판을 둘러봤으니 악양면의 명소를 구경할 차례다.
동정호에서 1㎞쯤 들어가면 골목을 벽화로 꾸민 하덕마을이 나온다. 골목길갤러리 ‘섬등’은 이 마을의 별칭이 섬등이라 붙은 이름이다.
마을이 섬처럼 동떨어져서 이렇게 불렸다고 한다.
벽화는 작가 27명이 마을에서 어르신들과 함께 일정 기간 머물며 완성했다.
마을 입구에 할머니 몇 분이 앉아 계신다. 인사드리자 “머 볼 게 있다 왔능교∼”라며 다정하게 맞아주신다.
마을 안쪽으로 들어서니 호젓한 골목이 이어지고, 차 꽃 벽화가 환하다.
골목마다 쇠로 만든 새싹, 농기구, 나무로 만든 황소 등 작품이 집과 어우러진다.
어느 집 열린 대문 너머로 엄마와 아빠, 아이의 장화 세 켤레가 가을볕을 쬔다.
왠지 고향에 온 듯 마음이 편해진다. 골목을 한 바퀴를 돌아 나와서 아까 뵌 할머니께 꾸벅 인사 올렸다. “할머니 볼 거 많아요. 구경 잘했다. 마을이 제 고향 같아요.”
하덕마을에서 1㎞쯤 더 들어가면 매암차문화박물관이 있다. 도로 옆에 자리한 박물관은 별거 없어 보이는데, 안으로 들어가면 눈이 휘둥그레진다.
잔디가 깔린 아담한 마당과 찻집 건물, 야외 테이블, 제법 넓은 차 밭이 펼쳐진다.
차 밭은 드물게 평지에 있어서 둘러보기 편하다. 매암차문화박물관에 있는 찻집 ‘매석’. 여기서 차를 구입하고 시음한다.
매암차문화박물관은 1963년 강성호씨가 다원을 조성해 2000년에 문을 열었다.
박물관에 있는 찻집 ‘매석’에서 홍차를 마신다. 이곳은 발효차인 홍차를 전문으로 만든다.
차는 발효 정도에 따라 발효하지 않은 녹차, 반 발효한 청차, 완전 발효한 홍차, 후 발효한 보이차로 구분한다. 세작으로 만든 홍차는 그윽한 맛이 일품이다.
차를 마시고 여유롭게 차 밭을 거닐다 보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하동 여행의 대미는 북천면 레일바이크로 장식하자. 우선 20분쯤 풍경열차를 타고 옛 양보역으로 이동한다. 여기서 레일바이크가 출발하면 비교적 내리막이 많아 힘들지 않다.
터널 구간 1㎞가 하이라이트다. 형형색색 LED 전구가 쏟아내는 불빛 덕분에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 여행하는 기분이 든다. 터널을 빠져나오면 내리막이다.
페달에서 발을 떼고 느긋하게 풍경을 감상한다. 누렇게 익어가는 들녘과 화사한 코스모스 꽃밭을 달리는 맛이 통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