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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 잊지 말아야 할 기록들
기사입력 2015-08-28 11:54   최종편집 경남우리신문
작성자 안기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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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군 ‘위안부’, 잊지 말아야 할 기록들     © 경남시사우리신문편집국

■ 47명, 공식 등록된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는 총 238명, 그 가운데 2015년 8월 현재 191명이 사망했다. 생존자는 총 47명(국내 43명, 국외 4명)이지만 공식 집계되지 않은 할머니들의 숫자는 등록한 할머니들의 숫자보다 수백 배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 정신대 vs. 위안부 vs. 성노예
 
정신대는 ‘일본을 위해 솔선해서 몸을 바치는 부대’ 라는 뜻으로 인력 동원을 적극적 으로 하기 위해 일제가 만든 용어이다.
 
현재 공식명칭은 일본군 '위안부'이며, 최근 유엔 등 국제사회에서는 위안부(comfort women)라는 용어와 함께 '일본군 성노예(military sexual slavery)'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일본군의 조직적이고도 강제적인 동원 사실을 설명하기도 한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는 일본군 ‘위안부’라는 용어가 가해의 주체인 ‘일본군’을 명기하고 있으며, 일제가 ‘위안부’라는 단어를 만들고 ‘위안소’를 제도화했던 당대의 특수한 분위기를 전달하는 역사적 용어라는 점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
 
현재 생존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평균연령은 89.1세, 이 중 90세 이상 초고령자만 19명에 달한다.
 
 
■ ILO 1조 & 11조, 일본은 국제법 위반
 
국제노동기구(ILO) 협약은 조약법에 관한 비엔나협약상의 국제조약으로서, 이를 비준한 국가에 대해서는 국제법상 법적 구속력을 가진다는 점에서는 일반적인 국제조약과 마찬가지이다.
 
일본은 강제노동 협약을 1932년 11월 21일 비준하였으므로, 위안부와 전시 강제징용 문제는 ILO에서 조약 위반의 문제로 다루어질 수가 있다. 강제노동 협약은 제1조와 11조에서 여성에 대한 강제노동을 금지하고 있으며, 14조와 15조에서 강제노동에 대한 보상의무를 규정하고 있다. 또한 25조에서는 강제노동을 강행한 책임자를 형사처벌해야 한다는 내용이 있다.
 
■ 舊 일본국 형법 제 226조, 일본은 일본형법 위반
 
당시 일본 형법 제226조는 ‘국외로 이송할 목적으로 사람을 약취·유괴·매매한 자, 약취·유괴·매매된 자를 국외로 이송한 자는 2년 이상의 유기 징역에 처한다.’ 라고 규정하고 있다. 때문에 불법을 지시하는 문서를 만들었을 가능성이 없고, 만약 있었다 하더라도 패전 직후 모조리 소각, 폐기됐을 것이다.
 
■ 일본 정부의 반성을 촉구하는 세계의 보고서들
 
◦ 국제법률가위원회 보고서(1994년)
◦ 유엔인권위원회 여성폭력특별보고관 라디카 쿠마라스와미 보고서(1996년)
◦ 유엔인권소위원회 무력분쟁하의 조직적 강간 성노예제 및 노예제 유사관행에 관한 특별보고관 게이 맥두걸 보고서(1998년)
 
■ 일본정부에 사죄와 배상을 요구한 세계의 재판들
 
‣ 아시아·태평양전쟁 한국인 희생자 보상 청구소송(1991년, 원고 9명)
‣ 부산 종군위안부 여자근로정신대 공식사과 등 청구소송(1992년, 원고 3명)
‣ 필리핀 종군위안부 국가 보상 청구소송(1993년, 원고 46명)
‣ 재일한국인 전 종군위안부 사과·보상 청구소송(1993년, 원고 1명)
‣ 네덜란드인 전 포로·민간 억류자 손해배상 청구소송(1994년, 원고 1명)
‣ 중국인 위안부 손해배상 청구소송(제1차)(1995년, 원고 4명)
‣ 중국인 위안부 손해배상 청구소송(제2차)(1996년, 원고 2명)
‣ 산시성 성폭력 피해자 손해배상 등 청구소송(1998년, 원고 10명)
‣ 대만인 전 위안부 사과 청구·손해배상 소송(1999년, 원고 9명)
‣ 하이난 섬 전투 당시 성폭력 피해 배상 청구소송(2001년, 원고 8명)
 
이 재판들은 모두 원고의 손해배상 청구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결론 내렸지만, 10건 중 8건(3번과 9번 제외)에 대한 판결은 모두 위안부의 피해와 그 실태를 사실로 인정했다.
 
위안소에 대한 일본군의 관여, 위안부가 되는 과정에서의 강제성, 위안소 안에서의 강제사역 등을 전면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또한 8개 재판의 판결을 통해 피해 사실을 인정받은 여성은 35명에 이른다(한국인 10명, 중국인 24명, 네덜란드인 1명). 이중 10대 미성년자였던 여성이 26명이나 된다.
 
■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 일본 법적 책임의 증거
 
일본은 1965년의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한일 청구권 협정)] 제2조 제1항에 의해 개인의 청구권문제까지 포함해서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 되었다고 주장한다. 일본정부는 이 한일 청구권 협정에 의해 위안부 개인에 대한 배상책임도 소멸됐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한일기본조약과 청구권협정을 축으로 하는 '1965년 체제'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논의조차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일본정부, 군 등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한일 청구권 협정에 의하여 해결된 것으로 볼 수 없고,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이 남아있다.
 
일본 야마구치(山口)지방법원 시모노세키(下關) 지부는 1998년 4월 1심 판결에서 한국인 위안부 피해자 3명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일본 국회가 배상입법을 할 의무를 게을리했다”며 “입법에 의한 피해회복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 1998년 시모노세키지부 판결
 
1992년12월, 한국피해여성 3명은 야마구치(山口)지법 시모노세키(下關)지부에 일본 국가상대 사죄와 배상청구 소송 제기했다. 그리고 98년 4월 27일 원고측의 일부승소판결이 내려졌다.
 
이날 야마구치(山口)지법 시모노세키(下關)지부에서 열린 1심 선고공판에서 재판부는 군위안부 3명에 대해 총 90만엔의 위자료를 지급할 것을 명령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일본 정부에 대해 "위안부들이 전시 중 당한 고통에 대한 회복조치를 취할 의무가 있다"고 전제, "지난 93년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당시 관방장관이 강제연행 사실을 인정한 담화발표 후 배상입법을 해야 할 헌법상의 의무가 있음에도 태만히 했다"고 지적하면서 국가 배상을 인정했다.
 
 
■ 1993년 고노 담화, 일본군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
 
※ 고노담화
1993년 8월 고노 요헤이 당시 관방장관이 일본군의 관여를 확인하는 한편, 위안부 모집·이송·관리 등에서의 강제성과 위안소 생활의 참혹함을 인정하고 사죄·반성의 뜻을 표명한 담화
 
(전문)“이번 조사 결과 장기간, 그리고 광범위한 지역에 위안소가 설치돼 수많은 위안부가 존재했다는 것이 인정됐다. 위안소는 당시의 군 당국의 요청에 따라 마련된 것이며 위안소의 설치, 관리 및 위안부의 이송에 관해서는 옛 일본군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이에 관여했다. ...(중략)...감언(甘言), 강압에 의하는 등 본인들의 의사에 반해 모집된 사례가 많았으며 더욱이 관헌(官憲) 등이 직접 이에 가담한 적도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또 위안소에서의 생활은 강제적인 상황하의 참혹한 것이었다. ...(중략)...정부는 이번 기회에 다시 한번 그 출신지가 어디인지를 불문하고 이른바 종군위안부로서 많은 고통을 겪고 몸과 마음에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은 모든 분에 대해 마음으로부터 사과와 반성의 뜻을 밝힌다. ...(중략)...”
 
■ 일본 정부가 해결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책무
 
1990년, 한국의 37개 여성단체가 공동성명을 발표하며 다음 6개 항목을 요구했다.
1. 일본 정부는 조선 여성들을 위안부로 끌고 간 사실을 인정하라.
2. 이 일에 대해 공식 사과하라.
3. 만행의 전모를 스스로 밝혀라.
4. 희생된 사람들을 위한 위령비를 건립하라.
5. 생존자와 유족에게 보상하라.
6. 이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역사 교육을 통해 이 사실을 전하라.
 
■ 8월 14일, 최초 공개 증언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고(故) 김학순 할머니는 1991년 8월 14일, 자신이 당한 위안부 피해 사실을 최초로 공개 증언했다.
 
일본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관여 사실을 부인할 뿐 아니라 관련 자료와 증거들을 은폐하고 파기한 상태에서 생존자들의 출현과 증언은 일본군의 만행을 밝히는 기폭제가 됐다. 그리고 그 해 12월 2일에는 대구에서 문옥주 할머니가 두 번째로 공개 증언을 했다.
 
■ 수요 시위, 천 번의 피맺힌 외침
 
정식 명칭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로 통상 수요시위 또는 수요집회라고 불리며 공식적으로는 ‘집회’가 아닌 ‘시위’란 용어를 사용한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진상 규명과 책임 이행 등 문제 해결 그리고 이를 통한 피해자들의 명예와 인권회복을 당사국에게 촉구하기 위해 대한민국 일본 대사관 앞 ‘평화로’(서울특별시 종로구 중학동 18-11)에서 매주 수요일 12시에 열린다.
 
1992년 1월 8일 당시 미야자와 기이치 일본 총리가 방한하여 한일 정상회담을 갖게 된 것을 계기로 시작되었으며, 2011년 12월 14일로 1000회를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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