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합천 삼가면 외토리에는 남명조식의 생가터와 그의 정신을 기리는 흔적인 용암서원이 있다.
용암서원 앞에는 조식 선생의 흉상과 그가 임금에게 올렸던 을묘사직소라는 상소문이 새겨진 커다란 돌덩이가 있다.
남명 조식 선생 이야기를 하면 함께 언급되는 인물이 퇴계 이황이다.1501년경상좌도에서 퇴계이황이 태어났고 경상우도에는 남명조식이 태어났다.
▲용암서원 앞에는 조식 선생의 흉상과 그가 임금에게 올렸던 을묘사직소라는 상소문이 새겨진 커다란 돌덩이가 있다. ©경남우리신문 편집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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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학파 형성기에 영남학파의 두 거봉이 된 이들은 같은해에 태어나 퇴계는 70세,남명은 72세까지 장수하며 퇴계학파와 남명락파로 분립되어 영수로써 정파를 형성했던 인물들이다.
퇴계는 1534년 34세 문과에 급제하여 승무원 부정자로서 사대부의 길을 걷게 됐지만 남명은 정치를 거부하고 재야 지식인의 길을 선택했다.
지금의 정치적 성향을 띤 권력을 맛 본 교수들과는 전혀 다른 삶을 걸었던 것이다.
난세에 출사하지 않고 처사로 일관하여 학문과 수양에 전념하고 반궁체험을 중시하여 실천없는 공허한 시직을 배격하고 의리를 투철히 했던 남명 조식 선생이다.
남명 조식 선생은 비리를 용납하지 않았고 불의에 타협하지 않았던 조식의 사상은 지금도 끊임없이 화자 되고 있다.
이러한 부분들이 현 정치인들과 구태 정치인들이 배워야 했지만 구태 정치인들이 아직까지 정치 권력에 서 있으니 어찌 변화를 기대 할 것인가?
용암서원 앞에는 선생의 흉상과 단성현감 을묘사직소를 올린 상소를 적은 글 귀가 있는데 이는 조정산하들의 대한 비판과 함께 왕과 대비에 대한 직선적인 표현으로 조정의 큰 파문을 일으켰던 내용이 담겨져 있다.
조식 선생의 상소문은 현 정치인들과 권력자들이 봐도 섬뜩하고 소름이 끼친다. 과연 오늘날 정치인 중에서 대통령을 향해 직언을 하고 살아남을 정치인이 있을까 하는 생각에 그냥 멈추고 만다.
노회찬 의원의 죽음은 정의로운 죽음일까? 왜 고인은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까? 아니면 드루킹 특검을 종결하자는 의미에서 희생양이 된 것 일까? 더 이상의 수사를 차단하기 위한 죽음이라면 정미홍 전 아나운서의 죽음은 무엇인가?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 되면서 촛불혁명으로 세워진 文 정부 실세 정치인들과 군주를 버린 권력자들에게 이글을 올려본다.
▲용암서원 앞에는 조식 선생의 흉상과 그가 임금에게 올렸던 을묘사직소라는 상소문이 새겨진 커다란 돌덩이가 있다. ©경남우리신문 편집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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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남명 조식 선생이 임금에게 올렸던 을묘사직소라는 상소문 내용이다.
선무랑으로서 단성현감에 새로 제수된 조식은 진실로 황공하여 머리를 조아리며 주상전하께 상소하옵니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선왕(중종)께서 신이 보잘것없는 줄을 모르시고 처음으로 참봉에 제수하셨고, 전하께서 왕위를 이어받으셔서 두 차례 주부에 제수하셨고 이번에 또 현감으로 제수하시니, 두렵고 불안하여 마치 산을 짊어진 듯합니다. 그럼에도 감히 한번 대궐에 나아가 전하의 은혜에 사은숙배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군주가 인재를 등용함은 목수가 목재를 가져다 쓰는 것과 같아,깊은 산과 큰 늪의 재목을 모두 이용해서 큰 집을 완공할 전에, 토목수가 알맞은 재목을 가져다 쓸 뿐이지 목재가 스스로 참여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전하께서 인재를 등용하심은 나라를 가진 군주로서의 책임이지만, 신은 맡은 일을 감당치 못할까 걱정됩니다. 이 때문에 감히 그 큰 은혜를 사사로이 받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신이 머뭇거리며 나아가기 어려워하는 뜻을, 어진이를 갈망하시는 전하께 감히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이 벼슬에 나아가기 어려워하는 까닭은 두가지입니다.
지금 신은 나이가 예순에 가깝지만 학술은 거칠고 어두우며 문장은 과거에 겨우 합격하기에도 부족하여, 행실은 물뿌리고 비질하는 일을 감당하기에도 부족합니다. 과거에 급제하려고 노력한 10여년 동안 세 차례나 실패하고 물러났으니, 애초 과거를 일삼지 않았던 사람이 아닙니다.
설사 과거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발끈하여 과거를 당장 집어치운 평범한 백성에 불과할 뿐 큰 일을 해낼 수 있는 능력을 두루 갖춘 인재가 아닙니다.
하물며 사람됨의 선악은 결코 과거 응시 여부에 달려 있지 않음에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미천한 신이 헛된 명망을 훔쳐서 담당 관원에게 잘못 알려졌고, 담당 관원은 신의 헛된 명망만을 듣고서 전하를 그르쳤습니다.
전하께서는 과연 신을 어떠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문장에 능한 자라고 해서 꼭 도가 있지는 않으며,도가 있는 사람은 반드시 신과 같지는 않을 것입니다. 전하께서만 신을 모르시는 것이 아니고, 재상들도 신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지 못하고 등용했다가 훗날 국가의 치욕이 된다면, 그 죄가 어찌 미천한 신에게만 있겠습니까? 헛된 명망을 바쳐 몸을 파느니보다는 실제로 곡식을 바쳐서 관직을 사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신은 차라리 제 한 몸을 저버릴지언정 차마 전하를 저버리지는 못하겠습니다. 이점이 나아가기 어려워하는 첫째 이유입니다.
전하의 나랏일은 이미 그릇되었으며,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했으며, 하늘의 뜻도 이미 떠나갔으며, 인심도 이미 떠났습니다. 비유하면 이 나라는 백 년 동안 벌레가 속을 갉아먹 진액이 이미 말라버린 큰 나무와 같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거센 비바람이 언제 갑자기 닥칠지를 까마득히 모르고 지내온지 오래 되었습니다.
조정의 인물 가운데 충성스럽고 뜻 있는 신하가 없는 것이 아니고,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나라 일에 힘 쓸 선비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손을 쓸 곳이 없다는 것을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낮은 벼슬아치는 아랫자리에서 희희덕거리며 주색을 즐기고 있으며, 높은 벼슬아치는 윗자리에서 어물거리며 오직 뇌물로 재산만 불리고 있습니다.
물고기의 배가 썩어가는데도 아무도 치유하려 하지 않고 있습니다. 게다가 내직에 있는 신하들은 용이 연못을 차지하고 버티듯 후원 세력을 심고 있으며, 외직에 있는 신하들은 들판에서 이리가 날뛰듯 백성을 수탈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가죽이 없어지면 털이 붙어있을 곳이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신은 이때문에 낮에는 깊이 생각하고 길이 탄식하면서 자주 하늘을 우러러 보고, 밤에는 흐느끼며 침울해 하면서 천정을 우러러 본지 오래 되었습니다. 대비께서는 비록 생각이 깊으시다 하나 깊은 궁중의 일개 과부에 지나지 않고 전하께서는 다만 선왕의 일개 어린 후사이실뿐입니다.
그러나 온갖 천재와 억만 갈래의 인심을 어떻게 감당해 내며 어떻게 수습하시겠습니까? 냇물이 마르고 곡식이 하늘에서 내리니 그 조짐이 무엇을 뜻하겠습니까? 노랫가락이 구슬프고 흰옷을 즐겨 입으니, 소리와 형상에서 이미 그 조짐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는 주공소공의 재주를 겸한 사람이 정승의 자리에 있다하더라도 또한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물며 지푸라기같은 미천한 신의 재주로써 무엇을 하겠습니까? 위로는 만에 하나도 위태로움을 붙들 수 없고, 아래로는 털끝만큼도 백성을 보호할 수 없을 것이니, 전하의 신하 노릇하기가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변변찮은 이름을 팔아 전하의 관직을 얻어 그 녹을 먹으면서도 그 녹에 맞는 일을 하지 못한다면 이 역시 신이 원하는 바가아닙니다. 이점이 둘째 이유입니다.
그리고 신이 보건대, 근래 변방에 왜적의 변란이 있어서 여러 대부들이 제때에 밥을 먹지 못합니다. 그러나 신은 이를 놀랍게 여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건은 20년 전에 터졌을 것인데 전하의 신성한 무덕에 힘입어 지금에야 비로서 터진 것이지, 하룻저녁에 갑자기 생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평소 조정에서 재물을 받고 사람을 임용하였기에 재물은 한 곳에 모였지만 백성은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장수로서 적합한 사람이 없고 성에는 군졸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왜적들이 무인지경으로 들어오듯이 쳐들어온 것이니, 어찌 이상하게 여길 일이겠습니까? 이것은 또한 대마도의 왜놈들이 본토의 왜놈들과 몰래 결탁하여 그 앞잡이가 되어 만고에 남을 치욕을 끼친 것 입니다.
왕의 신성한 위엄을 떨치지 못해서 적에게 어이없이 패하고 말았습니다.어찌 옛 신하를 대우하는 것은 주나라 법보다도 엄격하면서 왜적을 용납하는 은덕은 춘추시대 송나라보다 도리어 더 하단 말입니까? 세종대왕께서 남쪽으로 대마도를 정벌하시고 성종대왕께서 북쪽으로 여진족을 정벌하신 일을 보더라도, 어찌 오늘날 같은 일이 있었습니까? 그러나 이런 것은 피부에 생긴 병에 불과하고 심장이나 뱃속의 병은 못됩니다. 심장이나 뱃속의 병은 걸리고 막혀서 상하가 서로 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때가 경대부들이 목이 마르고 입술이 타도록 수레를 치달리며 분주히 주선을 해야하는 시점입니다.
근위병을 불러 모으고 국사를 정돈하는 것은, 자질구레한 정사나 형벌에 달려있지 않고 오직 전하의 마음 하나에 달려 있습니다. 말이 땀을 흘리듯 마음속으로 노심초사하여 만 마리의 소가 갈만한 넓은 땅에서 공을 거두는 것도 그 기틀은 전하 스스로의 마음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전하께서 좋아하시는 바는 무슨 일입니까? 학문을 좋아하십니까? 풍류와 여색을 좋아하십니까?활쏘기와 말 달리기를좋아하십니까? 군자를 좋아하십니까? 소인을 좋아하십니까? 좋아하시는 바에 따라 나라의 존망이 달려있습니다.만약 어느날 흠칫 놀라 깨달아 분발해 학문에 힘을 쓰시어 홀연히 명덕과 신민의 도리를 얻으신다면, 명덕과 신민의 도리 속에 온갖 선이 갖추어지고 온갖 교화도 거기서 나오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들어서 시행하면, 나라를 고루 잘 다스려지게 할 수 있고 백성을 화합하게 하 수 있으며 위태로움을 편안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요약하여 내 몸에 간직한다면, 텅 빈 거울이 만물을 비추듯 저울이 물건을 공평하게 되듯 생각에 사특함이 없게 될 것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선정이란 것도 이마음을 간진하는 데 달려 있을 뿐이니,위로 천리를 통달하는 측면에서는 유교와 불교가 한가지입니다. 다만 불교는 인사에서 시행할 경우 현실에 발을 붙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 유가에서는 배우지 않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이미 불교를 좋아하십니다.
만약 그 마음을 학문하는 데로 옮기신다면 바로 우리 유가의 일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만 하신다면 어렸을 때 집을 잃었던 아이가 제 집으로 돌아와서 부모친척형제친구를 만나보는 경우가 어찌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군주가 사람을 임용할 적에는 자신의 몸으로써 모범을 보여야 하고, 자신의 몸을 닦을 적에는 도로써 해야 하는 것 입니다. 전하께서 만약 사람을 등용하실 적에 자신의 몸으로써 하신다면 조정에 있는 사람이 모두 사직을 보위하지 않는 이가 없을 것입니다.
아무일도 모르는 미천한 신 같은 자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만약 사람을 취할 적에 몸으로써 하지 않으시고 눈으로만 하신다면 가까이서 시종하는 사람 말고는 모두 전하를 속이고 저버리는 무리일 것이니. 앞뒤가 꽉 막힌 고집스런 소신 같은 자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뒷날 전하께서 왕도정치를 행하는 경지로 덕화를 이룩하신다면 소신도 마부같은 말직에서나마 채찍을 잡고 마음과 힘을 다하여 신하의 직분을 다할 것이니 임금님을 섬길 날이 어찌 없겠습니까? 엎드려 원하옵건데 전하께서는 반드시 정심으로서 신민의 요체를 삼으시고 수신으로서 사람을 임용하는 근본으로 삼으셔서 왕도의 표준을 세우도록 하소서.
왕도의 표준이 표준 구실을 하지 못하면 나라는 나라로서의 구실을 못하게 될 것입니다. 밝게 살펴주시길 엎드려 바라옵니다. 신 조식은 떨리고 두려운 마음을 감당하지 못한채 죽음을 무릎쓰고 아뢰옵니다.